1.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개화 정책과 구식 군대의 반란

19세기 후반, 조선은 개항 이후 일본과 서구 열강의 영향을 받으며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 정책의 혜택은 일부 상류층에게만 돌아갔고, 구식 군대와 하층민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2년, 구식 군인들은 급료 체불과 신식 군대와의 차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구식 군대는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친일 개화파 관리들을 살해했다. 구식 군인들의 지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창덕궁을 장악했고 명성황후는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장례까지 치뤘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청나라는 조선의 군인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 내정에 간섭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일본은 반발했고, 배상금을 요구하며 군사적 개입을 준비했다.

2.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급진 개화파의 개혁 시도

개화 세력은 청나라의 간섭과 보수파의 반대를 극복하고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일본의 지원을 기대한 급진 개화파(김옥균, 박영효 등)는 1884년 12월, 친청 세력을 제거하고 개혁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개화파는 친청 세력을 공격하고 개혁 정부를 선언했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였다. 개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을 3일천하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조선 지배력을 보다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일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긴 했지만 일본의 조선 침략 야심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조선에서의 입지를 재정비하며 재도전을 준비했다.

결정적으로, 청과 일본은 텐진조약(1885년) 체결하며, 양국은 조선에 대한 상호 군사 개입을 금지하는 협정을 맺었지만, 이는 이후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3. 동학농민운동(1894년)과 청일전쟁(1894~1895년): 농민 항쟁과 열강의 충돌

조선의 농민들은 지배층의 수탈과 일본 및 청나라의 경제 침탈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에 1894년,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농민군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전개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전북 고부에서 봉기하여 전주성을 점령하고 개혁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고 청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면서 일본도 조선에 파병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텐진조약에 따르면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사를 파병할 경우 서로 통보해야 했으며, 사태가 해결되면 즉시 철수해야 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외세 개입을 경계하고 전투를 중단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군대를 주둔했다. 오히려 청과의 전쟁을 빌미로 조선에서 영향력을 강화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격파한 후에도 조선 내에 계속 주둔하며 청일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전략을 펼쳤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내부의 문제였지만, 청과 일본의 군대가 들어오면서 조선이 청·일 간의 전쟁터로 변하는 빌미가 되었다. 일본군은 동학군을 제압하는 것보다 조선 내에서 청군과의 전투를 준비하는 데 집중했다. 실제로 ‘풍도해전(1894년 7월 25일)’에서 일본이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며 청일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청나라의 조선 지배권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청나라 대신 러시아와의 외교를 강화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명성황후가 조선이 일본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걸림돌이었고, 이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이른바 ‘여우사냥’을 시도한 것이다.

4.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의 조선 장악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낭인과 군인들이 경복궁을 기습하여 궁궐을 장악하고, 왕비를 수색하였다. 명성황후(민비)는 시녀들과 함께 피신하였으나, 일본 자객들에게 발견되어 참살되었다. 이후 일본 측은 그녀의 시신을 불태우고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

을미사변 이후, 조선 내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으며, 고종은 일본의 압박 속에서 친일 내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외교적 흐름을 크게 변화시켰다. 즉, 조선은 일본 대신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러시아가 조선 내에서 경제적·군사적 이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일본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며, 친러 내각이 구성되었으며, 1897년 고종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 즉위를 선언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륙 무역을 확대하고, 일본 상인과 금융업자들이 조선 경제를 장악하도록 지원했다. 대한제국이 러시아, 미국과 협력하여 경제 자립을 시도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에 차관을 제공하려 시도하며 경제적 종속을 유도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었으나, 일본은 이를 견제하며 친일 성향의 개화 세력을 지원했다. 독립협회가 친러·친미 노선을 강화하려 하자, 일본은 이를 탄압하며 1898년 황국협회(친고종 세력)와 결탁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며 조선을 군사 거점으로 삼기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중립을 무력화시켰다. 일본군은 대한제국을 점령하며 조선에서의 지배력을 확립했다.

결론: 조선 말기 국제 정세와 개항의 흐름

청일전쟁부터 을미사변까지의 사건들은 조선의 자주권이 급격히 약화되는 과정 속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 야욕을 실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의 몰락 후에도 조선이 여전히 러시아 등 외세에 의존하려 하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려 한 것이었다. 이는 결국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지며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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